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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제1공화국 본문

Review/Book Review

이승만과 제1공화국

Actruce 2022. 12. 9. 22:01

2021.4.1 작성. 다음블로그 -> 티스토리 이전(2022.12.09)

 

 

지은이 : 박문국

출판사 : 소라주

출편년 : 2016

 

 

목차

 

1장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 : 1945년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한국인의 국가 건설은 이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단결이라는 허황된 슬로건
해방 후 첫 번째 외세, 소련
38선
건준에서 인공으로
군인의 정치
최초의 정당, 한국민주당
이승만의 귀국
김일성의 등장
김구의 귀국
신의주 반공 학생 사건
결어

2장 분단을 향하여 : 1946 - 1948년
신탁통치 오보 사건
반탁의 열기와 김구의 쿠데타
반탁과 찬탁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읍 발언
좌우합작운동
대구 10ㆍ1 사건
흔들리는 좌우합작
트루먼 독트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여운형 쓰러지다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남북협상
결어

3장 국가의 정체성 : 1948 - 1950년
5ㆍ10 총선거
제헌헌법의 쟁점
제1공화국의 시작
제주 4ㆍ3 사건
여순사건
국가보안법과 일민주의
반민특위
이승만의 6월 공세
38선을 베고 죽다
조봉암과 농지 개혁법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어

4장 한국전쟁 : 1950 - 1953년
전쟁의 전조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울 함락
보도연맹 학살 사건
서울에서의 3일
미국의 참전
낙동강 전선
인천 상륙작전
중공군의 참전
1ㆍ4 후퇴
국민방위군 사건
맥아더의 파면
휴전으로 향하는 길
반공 포로 석방 사건
결어

5장 독재의 제도화 : 1953 - 1959년
부산 정치 파동
이승만 후기 체제 확립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원조 경제와 정경 유착
정치깡패의 시대
사사오입 개헌
하나의 목적, 두 명의 후보
사상 초유의 선거바람
위기를 직시하지 못한 이승만
사회민주주의와 평화통일론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의 야합
진보당 사건
결어

6장 4월 혁명 : 1959 - 1960년
시민의식의 성장-교육
시민의식의 성장-언론
미국의 입장 변화
이승만의 선거 승리 각본
혁명의 열기는 학생으로부터
3ㆍ15 부정선거
혁명 전야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시국선언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결어


 

현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인 이승만과 박정희, 특히 박정희는 군사독재나 새마을운동, 경제개발계획, 유신헌법, 김재규 저격등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이해되는 인물인데 반해 이승만은 좀 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나에게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부터 해방, 미군정 및 제헌정부 수립, 6.25 동란 및 4.19 사태에 이르기 까지 오히려 박정희 보다 한국 근현대사에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라는 생각마져 갖게 되었다.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양파껍질 처럼, 불행히도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지독하게 구린 그런 냄새가 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때로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 두려워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 책은 간결하여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역사적 사건과 인물, 시대상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짜여진 책이었다. 책 한권으로 그를 제대로 알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적어도 내가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내용들은 이 책을 통해서 꽤 알게 되었다. 

 

미국 유학파로 인정받고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받았으나, 수 많은 학살을 통해서 미군정에 아부하고 백성을 권력 유지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은 폭군임은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명확해 졌다. 비단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을지라도 남한은 미군정 체제하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진행했을 것이며, 더욱이 자행되지 않았어야 할 수많은 양민학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로인한 역사적 상처들도 훨씬 적었으리라. 70년 동안 이데올로기의 덫에 갖혀 서로를 적대시하는 일들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 책은 각장의 제목들이 제시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승만 시대의 슬픈 단면을 보여준다.


 

1장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에서는 1945년 급작스런 해방이후의 정국을 수습되지 못한 일련의 사건들로 재조명해 준다. 이 장의 주인공은 여운형이었다. 건준을 거쳐 인민공화국의 설립으로 대표적 좌익세력의 수장으로 정치·치안 공백 아래의 조선의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었다. 이후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의 인물이 나오고 미군정의 주둔과 소련과 김일성의 북한이 어떻게 해방 이후의 각개 정치세력이 성립되어 가는지 보여준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보시오. 농민, 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반동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 사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 여운형 조선인민당 창당 대회 연설


 

 

2장의 분단을 향하여 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신탁·반탁으로 극렬하게 대립했던 모습들을 보여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의 처칠의 철의장막 발언 이후 트루먼 독트린으로 인하여 소련과 미국이 본격으로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 커다란 먹구름이 씌워지게 된 사실들을 보여준다.

 

"발트 해의 수체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Iron Curtain)' 이 드리워졌습니다. 이 장막 뒤에는 동유럽과 중유럽 여러 나라들의 낯익은 도시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그 도시들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곳을 모두 '소련의 세력권' 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로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힘이 단순한 영향력을 넘어서 그곳들을 조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처칠의 웨스터민스터 사원 연설


 

3장의 국가의 정체성 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시작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다. 기대했던 거국내각과는 다르게 친 이승만 내각이 들어선 것에 실망한 한민당은 이승만과 결별하게 된다. 한편, 제주에서는 4·3 사건이 발생하고 토벌과정에서 여수에 주둔중이던 14연대의 항명으로 여순사건이 발생한다. 제주와 여순사건을 겪은 정부는 일제시대의 치유보안법을 골자로 유사한 '국가보안법'을 공포한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을 법제화하고 반공국가로 나아가는 중추 역할을 했다. 국가보안법보다 한층 노골적인 것은 문교부 장관 안호상에 의해 구체화된 일민주의였다. 독일 유학파이자 족청의 부단장이었던 그는 나치가 보여준 히틀러 추종과 유사한 내용의 이론을 정립한다. 일민주의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표어로 대표되었다. 친일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구는 1949년 6월 6일 안두희에게 4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다. 1950년 2월 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 일민주의는 우리 3천만의 최고 영도자이신 이승만 박사의 밝은 이성의 판단과 맑은 양심의 반성과, 그리고 또 굳센 의지의 결정으로서 단순 한배검의 홍익인간의 정신과 신라의 화랑도의 사상을 이어받아, 현대의 모든 이론체계를 없애 가진 가장 깊고 큰 주의이다. 우리 이 박사의 위대한 인격과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사상으로 된 이 일민주의는 우리 백성이 영원히 살아갈 지도 원리다. 이 일민주의 사상으로써 이 박사께서는 40여년을 싸운 결과 우리 조국을 독립시켰으며 또 현재에 조국을 보호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민주의로써 우리의 조국을 영원히 발전시키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3천만 겨레는 재래의 모든 주의들과 주장들을 모조리 다 버리고, 오직 이 일민주의의 깃발 밑으로 모여야 된다.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4장의 한국전쟁 에서는 6.25 남침에서 비롯된 한국전쟁에서의 무능하면서도 잔악한 이승만 정부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강철교 폭파 사건 및 보도연맹 학살사건,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다.


 

5장의 독재의 제도화 에서는 재집권을 위해서 벌인 이승만의 처절한 코미디를 보여준다.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사건들. 대통령 직속선거로의 개헌을 위해 자유당을 만들고 여기에 친일 세력들을 대거 끌여 자유당을 장악한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부정을 일삼으며 3번째 대통령직을 위한 기반을 닦는데. 결국 사사오입 개헌과 조봉암의 정치적 사살은 그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시대에 무엇을 한 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때 뭘 했든지 간에 그때 친일로 지목된 사람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 사람의 의사와 행동으로 표시되고 안 되고에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고등관을 지냈고 또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한 사적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 와서는 그 죄를 탕감받을 만한 일과 사실이 있어가지고 모든 사람이 양해를 받을 만한 일을 해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친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증명받을 만하면 전에 일은 다 불문하고 애국하는 국민으로 인정받고 대우해줄 것이다."

- 이승만, 1954년 4월 7일, '명백한 관찰자로 흑백 가려라, 친일파 문제에 대하여'


 

6장의 4월 혁명 에서는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 혁명이 발생한다. 4월 25일 대학 교수 285명이 시국선언을 통해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면서 다음날 오전 10시경 라디오를 통해서 이승만의 하야 성명서가 발표된다. 이기붕와 부인, 그의 아들은 경무대 관사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

- 이승만 '하야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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