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g's by Actr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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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Review

스토너

Actruce 2025. 6. 11. 23:47

 

 

지은이 : 존 윌리엄스

출판사 :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일 : 2015년 1월 2일

 

목차 없음

 

 

 

 

 

 

 

 

 

 

 


 

사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홀로 찾은 4월의 제주에서 하릴없이 방문한 독립 서점 책장 한쪽 귀퉁이에서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새로운 표지의 스토너를 발견했다. 몇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보았을 뿐인데, 의외로 강렬한 인상을 내게 심어주어 구매까지 이어질 뻔한 그런 책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커스톰 디자인 표지 값이 반영된 탓인지 교보문고 가격에 비해 50% 이상 차이가 나서 구매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제주를 다녀온 이후에도 이 책은 마음 한 구석이 남아서 잊혀지질 않았고, 이윽고 처제의 생일에  때마침 생각나 선물로 건네게 되었다.

 

그 후로 얼마가 지났을까? 우연히 보게 된 유투브 광고에서 스토너가 역주행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책이 되었고, 시중에서 스토너 열풍이 불어 서가에 품절되는 사례까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서둘러 이 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두 번 구매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학교 도서관을 뒤졌다. 역시나 인기 있는 책이었는지 예약에 예약이 차 있어서 나는 3번째 예약자로 대기를 하고 일단 빨리 읽을 생각은 단념해 버리고 말았다. 한 달여가 지나서 나는 스토너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시시하게도 스포일러를 처음부터 내뱉고 시작을 했다. 스토너의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삶. 객관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길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간 스토너 임을 처음부터 아예 알려주고 시작을 한다. 어릴적 이야기도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었다. 어찌어찌 몇몇의 우연이 겹쳐 스토너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고, 이후 아처 슬론 교수의 눈에 들어 대학원 과정을 진학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스토너의 진면목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아주 짧은 스토리이다. 스토너의 이야기는 그가 박사과정에서 학부생들을 강의하게 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열정과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청년의 스토너와 중년의 스토너, 노년의 스토너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물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을 정리하면서 군데군데 책갈피 해 놓은 부분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다시 읽으면서도 감탄이 나오는 구절들이 분명있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면서도, 여러번 아주 자연스럽게 내 앞에서 스토너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차분한 미중부의 컬럼비아 거리와 교정의 모습들이 눈 앞에 아른거리고 스토너가 느꼈을 쓸쓸함과 외로움, 영문학에 대한 존경심과 자신을 스쳐간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같은 것들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스토너는 사실 존경받을 만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지도 못했고 윤리적으로 떳떳할 만한 사생활을 가지지도 못했고, 자녀를 올바로 키우지도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더더욱 입신양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스토너가 된 듯이 스토너 편이 되어 상대방과 맞서 싸우고, 불륜을 이해하고 스토너의 일종의 고집스러운 측면을 두둔하게 되었다.

 

그것은 스토너의 배경을 이해하고, 그의 행동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몰입하게한 작가의 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토너는 우리들 개개인 하나하나의 모습이었다. 젊음의 미숙한 열정으로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상대와의 밀접한 교감없이 파편화되었고, 교수직은 말썽 꾸러기 학생을 둘러싼 신임 교수와의 갈등으로 구석으로 내 몰렸으며, 이런 파국을 보상이라도 받을 듯 대학원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본인 스스로를 극한까지 치닫게 했다. 하지만 스토너는 이런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영문학을 사랑하고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고 인식의 경지를 벗어나 강단에서 가르치는 스토너의 모습은 혼란스럽던 1,2차 세계대전의 사회상과 더불어 그 시대를 처연하게 살아낸 스토너의 위대한 삶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스토너에서 내가 갈무리 한 부분들을 인용하고 마치려 한다.


41페이지, 스토너가 처음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 그는 학생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을 때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수업에서는 아처 슬론이 수업 중에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그 자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그날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수업 중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작성한 과제물에 만족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어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과제물에는 그가 마음 깊숙이 알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85페이지, 이디스의 부모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 보스트윅 부인은 남편보다 말수가 적고, 자기 얘기도 남편처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녀는 남부 숙녀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이었다. 역사는 길지만 은근히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곤궁한 살림이 집안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른들의 가르침은 그녀에게 앞으로 상황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나아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호러스 보스트윅과 결혼할 때도 아예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습관적인 불만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불만과 앙심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그런 감정이 그녀의 삶에 워낙 깊고 넓게 베어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도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107페이지, 이디스와 결혼 직후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가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전보다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침대를 쓰는 것만은 고집스럽게 그만두지 않았다.

 

132, 133 페이지, 로맥스와의 첫 만남

『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138페이지, 스토너와 이디스의 새 집들이 파티

『 파티는 여느 파티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중구난방으로 시작된 대화는 금방 미약한 힘을 얻어 별로 상관이 없는 다른 주제로 옮겨갔다. 웃음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짧게 끊어졌다. 계속 이어지지만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사격이 거실 전체를 뒤덮은 가운데 작은 폭탄들이 터지는 소리 같았다. 참석자들은 조용히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듯이 무심하게 이곳저곳으로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중 몇몇은 이디스나 윌리엄의 손에 이끌려 스파이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오래된 집들이 새집보다 훨씬 낫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요즘 도시 외곽 여기저기에 세워지는 집들은 옛집보다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141페이지, 파티 후 침실에서

『 이디스의 옷이 침대 옆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이불도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었다. 이디스는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침대보 위에 알몸으로 젖혀져 있었다. 알몸으로 널브러진 그녀의 모습이 느슨하고 방탕하게 보였다. 게다가 연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윌리엄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142, 143 페이지, 새 집의 서재방을 가꿔가는 스토너

『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을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170페이지, 저술과 연구의 시기

『 하지만 오늘 저녁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날 동안은 여유롭게 저서를 준비하는 일에 저녁시간을 바칠 수 있었다. 이번 책에 쓰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는 그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시간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모두 첫 번째 저서보다 폭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었다. ... 중략 ... 지금은 연구를 기획하는 단계였는데, 이것은 그가 가장 즐거워하는 단계이기도 했다. 여러 접근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고 몇몇 전략은 퇴짜를 놓는 일, 아직 탐구해보지 않은 가능성의 영역 안에 들어 있는 신비와 불확실성,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 …… 눈앞에 보이는 가능성들에 마음이 들떠서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52, 253 페이지, 찰스 워커건으로 로맥스에게 당한 뒤 교정에서

『 한번은 저녁강의를 마친 뒤 늦게 연구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낮에 눈이 내려서 바깥 풍경이 하얗고 부드럽게 보였다. 연구실 안은 지나치게 더웠다. 그는 사방이 막힌 연구실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책상 옆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며 하얗게 변한 캠퍼스를 눈으로 방황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책상 위의 불을 끄고는 덥고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 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앉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272, 273, 274페이지,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연애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 떨어져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 중략 ...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鄕愁)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300, 301, 304 페이지, 캐서린과의 마지막

『 세월이 흐른 뒤 가끔 그는 고든 핀치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동안의 일을 회상해보았지만, 명확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는데도 오로지 고집스러운 의지력 덕분에 습관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 중략 ...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 중략 ...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끌어안았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나눴다. 서로를 잘 아는 오랜 연인들의 부드러운 관능과 상실을 앞두고 새로이 솟아난 강렬한 열정으로 사랑을 나눴다. ... 중략... 스토너는 조용히 일어나서 어둠 속에서 옷을 입고 그녀를 깨우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동쪽에서 회색 빛이 처음 밝아올 때까지 컬럼비아의 적막한 거리를 걷다가 캠퍼스로 향했다. 그는 제시 홀 앞의 돌계단에 앉아 동쪽에서 떠오른 빛이 안뜰 한복판의 커다란 돌기둥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낡은 건물을 안에서부터 망가뜨린 화재가 생각났다.

 

309, 310페이지, 젊은 교수들과 달랐던 스토너

『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는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비록 스토너는 그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의식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항상 단단하고 황량한 표정을 짓게 되었던 그 10년 동안, 그런 표정을 공기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던 윌리엄 스토너는 어렸을 때부터 겪은 전반적인 절망의 징조를 보았다. 좋은 사람들이 번듯한 생활에 대한 꿈이 깨어지면서 함께 망가져서 서서히 절망을 향해 스러져가는 것이 보였다.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그들의 눈은 유리조각처럼 공허했다. 그들은 스스로 처형장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자존심을 품고 남의 집 뒷문으로 다가와 빵을 구걸했다. 그것을 먹으면 구걸에 나설 기운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니. 한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 있게 걷던 이들이 이제는 부러움과 증오가 깃든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학의 종신교수로서 누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안정감이 어떻게든 사라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식한 이런 일들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깊숙이 숨겨져 있어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를 변화시켰다.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곤궁한 생활에 대한 조용한 슬픔이 그가 살아가는 매 순간 한번도 깊숙이 파묻혀버리지 않았다.

 

352, 353페이지, 캐서린의 소식을 들은 스토너

『 갑자기 그녀가 바로 옆방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다가 온 것 같았다. 방금 그녀를 만졌던 것처럼 손이 저릿거렸다. 그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한,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387, 388 페이지, 스토너의 마지막

『 그 목소리 (고든인가?)는 그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단어들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그의 머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납게 덤벼들었다. 그래서 그는 냉혹한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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