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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여행인간 본문

Review/Book Review

은둔형 여행인간

Actruce 2026. 2. 1. 21:24

 

지은이 : 박성호

출판사 : 넥서스BOOKS

출판일 : 2020년 10월 29일

 

목차

Prologue 은둔형 여행 인간

#01 시간을 멈추러 가는 야간열차
#02 절벽 옆의 주방 없는 집
#03 공양 냄비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04 도시 탈출
#05 육 리터 와인
#06 낭떠러지 줄넘기
#07 동키 킥 레프트
#08 노르웨이 정어리와 창밖의 우유
#09 아날로그 인간
#10 강아지 사교 파티
#11 출근하지 않는 삶
#12 구름에 잠긴 마을
#13 선글라스 알의 협박
#14 나를 떠나는 여행
#15 아침 면도 의식
#16 새끼 거미 마이크
#17 어설픈 미국 사람
#18 거대함의 위안
#19 통조림 실험실
#20 네개의 싱글 침대
#21 청접장 출사표
#22 하산
#23 출항, 한 템포 느린 이별

Epilogue 사하라 모래

 


이 책은 도서관 1층 여행책 코너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책이다. 유럽부터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과 국내의 다양한 여행 책들을 거의 대부분 살펴본 바 이 책이 가장 이끌렸다. 우선 사진+여행기, 사진+여행기, ... 이렇게 반복되는 단순한 기행문 정도의 책은 스킵했다. 내용도 단편적일 뿐더러 그저 여행자의 주관적인 경험담과 약간의  MSG가 뿌려진 자극적인 내용들이 첨가된 정도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의 눈길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두번째로 여행 가이드류의 교통, 항공, 숙박,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책도 스킵했다. 난 지금 당장 떠날 여행지를 갖고 있지를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조판이 조악하거나 너무 딱딱한 책들을 걸렀다. 그러고 나니 남는건 국내, 국외를 통틀어 이 책뿐이었다. 심플하게 문장 위주의 구성이었으나 사진으로 도배되지 않아 마음에 들었고, 오래 한 곳에 머물면서 자유롭게 사색한 내용들을 자신만의 견해를 갖고 펼쳐낸 부분이 흥미로왔다.

 

작가는 바르셀로나 햄버거 가게에서 카메라를 도둑맞고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조지아의 산골마을 스페판츠민다 마을로 들어선다. 여행지에서 카메라로 멋진 샷을 건져내는 것들이 일종의 업이었을 텐데 카메라를 도둑 맞았기 때문에 작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여행을 튼것이다. 조용한 산골마을에서 방해받지 않고 글쓰기와 책읽기를 하자는 결심이다. 몇 달간을 사진기 없이 또 인터넷과 주방없이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지루할 지도 모르는 다소 도박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어쩌면 그런 것이 나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집에 벽걸이 TV 는 이제 3살 딸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페파피그' 라는 돼지가 주인공은 만화 영화는 최애 만화영화이고 중고 DVD 로 틀어주는 '자연이랑' 은 책과 콜라보 되어 딸아이가 매일 틀어달라고 조르는 간식이 되어 버렸다. 나도 책을 읽고 나니, 당장에라도 벽걸이 TV 를 갖다 팔고 2단 책장을 그 자리에 대신 자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도파민 홍수의 시대에 생각을 비우고 책을 읽으며 머리속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만들어 나가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지 싶었다.

 

이 책의 몇 부분을 갈무리하고 이제 반납해야겠다.

 

#13 선글라스 알의 협박

이렇게 보면 실제로 떠나는 여행이 소파에서의 상상 속 여행보다 좋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여행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결론짓기에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다. 혹여나 여행이 실망스럽고 고생스러운 일이었음에도, 천천히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 아름답고 그리운 기억으로 남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억은 현실의 경험보다는 오히려 기대와 닮았다. 기억은 내가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경험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생략한다. 아무리 많은 부산함과 실망스러움이 그 자리에 함께였다고 한들, 기억의 과정에서 거슬리는 동행들은 축소되거나 어디론가 사려져 버린다. 오직 내가 원했던 주제만이 곱게 단장해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 중략 ...

다행이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기대와 기억이, 거친 현실 보다 훨씬 매끄럽게 다듬어져 나온다는 것이.

만약 기대가 볼품없고 초라하다면, 나는 무엇도 쉽게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기억이 어떠한 정제도 거치지 않은 채 원석 그대로 남게 된다면, 삶이 지금보다 몇 배는 고달플지도 모른다. 한껏 미화된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은 위험하지만,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된다는 점'이 적어도 삶을 서너 뼘쯤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18 거대함의 위안

그러나 거대한 자연에서 느끼는 '작아지는 기분'은 이처럼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끼려면 상대방의 태도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자연은 비록 위협이 될지라도 어떠한 사심이나 감정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중략 ...

그러면 이 자연에서 오는 '작아지는 기분'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굳이 자연에 압도당하고 스스로 복종하기 위해 높고 험난한 산을 오르고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을 걷는 것일까? 해답은 자연이 작게 만드는 것이 비단 나 자신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나는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연은 내 삶의 영역 전체를 작아지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영역은 내가 실제로 일상을 보내는 공간의 영역을 포함해, 생각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범위 전체를 말한다.

평소 이 영역은 수많은 문제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계의 문제, 성과의 문제, 금전적 문제. 대체로 사소한 문제는 완벽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고 살지만, 가끔은 뜻하지 않게 제 몸집에 살을 붙여 가며 비대해지는 문제가 나타나 일상을 파괴한다. 이러한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원인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더는 내 힘으로 감당 못 할 수준까지 불어나기 쉽다.

이럴 때 거대한 자연이 주는 '작아지는 기분'이 도움이 된다. 내 삶의 영역 전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삶을 채우고 있는 문제들도 함께 작아지는 까닭이다.

... 중략 ...

물론 그런데도 작게 느낄 수 없는 문제도 존재한다. 모든 문제가 나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니까. 주변인의 죽음, 태생적 고난, 느닷없이 닥친 불행, 한계의 자각 등은 작아지는 것에 저항한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한 자연이 마지막으로 주는 조언은 체념이다.

... 중략 ...

거대한 자연이 작게 만드는 두 번째는, 사람 존재에 대한 생각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아지는 기분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나 하나만을 작아지게 만들지만, 거대한 자연은 세상 모든 사람의 존재를 작아지게 만든다.

이러한 특성이 사람 정신을 치유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사람 존재가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크기를 가지고 있으면,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의 일과 임금에 불만을 품은 상황이라 했을 때, 집 앞 도로에서 고급 외제 차를 타고 있는 소꿉친구를 마주치는 것은 반갑지 않은 경험일 수 있다. 언젠가 교실에서 함께 장난치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의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고, 상대적 박탈감에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한낱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개개인의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것이 된다.

 

#20 네 개의 싱글 침대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의 이 말을 떠올릴 때면, 산골 마을에 있는 동안 내 삶은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 하루가 실제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머릿속에서만 반복되고 있는 가상의 창조물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현실의 시간은, 지구 반대편에서 아랑곳없이 나를 기다리며 멈춰 있을 것만 같다. 적어도 이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물론, 그것은 내 바람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하얀 천장이 가장 먼저 보인다. 천장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소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한국에 있는 집 내 방에서 깨어났다고 착각하곤 한다. 문밖으로 화사하게 꽃 피어 있을 양재천이 생각나고, 돌다리를 건너면 3호선 매봉역이 보일 것만 같다. 자연스럽게 가족과 친구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의 모습이 만들어주는 안정감에 행복해진다.

... 중략 ...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외로움을 떨치기 위한 노력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면 언제라도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단순히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쉽게 메워질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채우지 못했다.

유대감의 상실에서 오는 외로움이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낄 정도로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 머릿속에 이미 되돌아가고 싶은 장소와 보고 싶은 사람들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과거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나는 나 스스로 마을의 이방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기분이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완벽히 혼자인 상황에서의 외로움이 그나마 쉽게 체념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무리 속에서의 외로움은 소외감과 이질감까지 더해진다.

... 중략 ...

결국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이겨 낼 수 있다고 다짐하더라도, 외로움의 가벼운 상흔이 여러 번 겹쳐져 더는 아물지 못할 상태가 된 것 같다. 정말 열심히 했고, 잘 버텨왔지만,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 마침내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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