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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Review

행복하기 행복전하기, 법륜스님

Actruce 2022. 12. 9. 20:37

2020.4.22 작성. 다음블로그 -> 티스토리 이전(2022.12.09)

 

 

행복하기 행복전하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3)

법륜스님 지음

 

목차

책을 펴내며
서문

1부 복
-먹고 살기가 힘듭니다
-복을 불러오는 기도
-남편이 원망스러워요
.
.
2부 단풍
-나이 칠십,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음이 두려워요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
.
3부 초심
-어떻게 해야 놓을 수 있습니까?
-'울컥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무아'라는 건 되는 대로 살기?

 


최근 고민이 많아지면서 생활도 불규칙해 지고, 급격한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튜브를 통해 알게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좌를 보다보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부분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책까지 빌려 보게 되었다. 불교 정토회라는 곳에서 무료 강연을 진행하면서 스님이 답한 내용을 엮어서 책으로 낸 것이다.

사람들마다 물어보는 고민의 내용도 다르고, 처한 위치나 살아온 배경이 다른데도 스님의 답변을 거치면 고민이 고민이 아닌게 된다. 심지어 이혼하게 되더라도 고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ㅠ.ㅠ

스님의 말을 재 해석할 재간이 없기 때문에 인상 깊었던 내용 중에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제목 -> 소제목, 질문 -> 청중의 질문, 대답 -> 법륜 스님 대답)


96~102page
제목 : 나이 칠십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질문:
나이 칠십이 넘어 돌이켜보니 허수아비 인생을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인연과를 제대로 체득하지 못하고, 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기만 해서 걱정입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답: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비틀비틀 갈 지(之)자로 걷습니다. 그것을 보고 "당신, 많이 취했군요." 했을 때 "뭐라고! 내가 취했다고? 나는 멀쩡해." 라고 대답하면 그 사람은 술 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틀비틀하는 것을 보고 술 취했다고 했더니 "아, 그래 오늘 좀 취했어. 한 잔 먹었더니 얼떨떨하고 몸이 잘 안 움직이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취하기는 했어도 제정신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참 알 수가 없구나. 인생을 헛 산 것은 아닐까?' 이렇게 돌이켜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질문하신 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지금처럼 정진해 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술을 안 먹어야 하는데 또 내가 술을 먹었어. 나는 인생을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하면서 신세타령을 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나는 아직 깨닫지도 못했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인과도 제대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모르고 있는 상태임을 아는 수준을 넘어서서, 약간 자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부가 조금 빗나간 것입니다.

"내가 효도 안 한 게 뭐 있어요. 이만하면 잘 하는 거지." 이렇게 큰 소리 뻥뻥 치면 불효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불효자야." 하면서 부모 무덤가에서 밤낮으로 울거나 고향의 부모를 그리면서 매일 부모 걱정을 하는 사람도 효자는 아닙니다. 자기가 잘했다고 우기는 사람은 최하급이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책하는 사람은 그 다음으로 낮은 단계입니다.

수행자는 잘못했을 때 자신이 잘못한 줄 알아차리고 그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알아차린 뒤에 '나는 항상 이래' 하면서 뒤로 가지 말고 '다음에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 하고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가지고 '내가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꿈속의 얘기라는 말입니다. '내가 조금만 젊었더라도, 불법을 조금만 빨리 만났더라도 정진을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책하고 후회하는 것은 수행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남이 들으면 자기를 반성하고 착실하게 사는 것 같을지 몰라도 이것은 꿈속을 헤매는 것에 속합니다. 술이 취했을 때 취한 줄 알고,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아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가 부족한 것을 탓하는 마음이 질문 속에 약간 배어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수행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원만해지고 부모 자식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혜라는 것은 자기 내면이든 바깥이든 세상의 흐름을 사실 그대로 보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옛날에 획득한 지식, 정보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언젠가 뱀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서 잠만 자면 뱀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뱀이 있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내가 열 살, 스무 살 어린 시절에 어떤 남자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그 기억이 머리에 계속 남아서 지금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생이 왜곡되고 있다면 이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우리들의 정신이든,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고 늘 이렇게 변화하고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는 굳어서 변화된 현실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 나이가 오륙십 된 사람은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아직도 어릴 때의 사고,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고 있어요. 과거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과 똑같아요. 젊은이 들은 요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같은 것을 놓고 서로 다르게 보는 거예요. 나이 든 세대가 볼 때는 젊은 애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고, 얘들이 크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젊은 세대를 보고 위험한 존재, 나라 망칠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연세 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꼴통이라고 합니다. 젊은 세대는 보수 세력을 보고 수구 꼴통이라고 합니다. 자기 아버지보고도 꼰대라고 하잖아요. 서로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이쪽은 이쪽대로 데모하고 저쪽은 저쪽대로 데모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 그 원인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고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생각을 갖고 다른 관점을 가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생각이나 관점, 가치관이 달라도 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물을 보는 가치관은 서로 다 다릅니다.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게 아닌데,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남의 생각을 바꾸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 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동의하지 않더라도 싸울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몸이 늙으면 뼈도 굳고 피부나 근육이나 심줄이 다 굳죠. 봄에 피는 나뭇잎은 보들보들한데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서 가랑잎이 되면 퍼석퍼석해지는 것과 똑같아요. 이것은 자연의 이치예요.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쁜 게 아닙니다. 얼음이 좋으냐 물이 좋으냐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기온이 떨어지면 얼음처럼 딱딱해지고 기온이 높아지면 물처럼 부드러워지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태어날 때, 10살 때, 20살 때, 50살 때, 60살 때, 80살 때 중 어떤 시기가 좋고 어떤 시기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겨울에 낙엽이 다 떨어졌을 때는 소나무 같은 상록수가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봄에 새 잎이 피어나서 색깔이 예쁠 때 소나무를 보면 우중충해 보입니다. 소나무는 계속 푸르다고 생각하면 잘못이에요. 낙엽수는 가을이 되면 왕창 떨어지고 봄에 왕창 새로 피지만, 소나무는 봄이 되면 하나씩 떨어지고 하나씩 펴서 그 시퍼런 것이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 늘 새파라니까 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뿐이지 결국 1년 지나면 다 떨어집니다. 2년 가는 것 없습니다. 한꺼번에 떨어졌다가 봄에 한꺼번에 새로 피느냐, 아니면 한쪽에서 피고 한쪽에서 떨어지면서 교체가 되느냐 그 차이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볼때 자기 눈에 보이면 그것이 항상 그렇게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눈에 안 보이면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숨이 끊어져 몸이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이나 지금 하루하루 세포가 바뀌는 것이나 전체적으로 보면 다 똑같은 변화인 거예요. 지금 바뀌는 것은 소나무 잎이 피면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상태여서 남이 볼 때 늘 푸르게 있는 것 같이 느끼고, 몸이 한꺼번에 급속도로 해체되는 것은 가을에 낙엽이 한꺼번에 떨어지면서 나무가 죽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실재하는 건 변화뿐인데, 보이면 살았다고하고, 안 보이면 죽었다고 하고, 안 보이다 보이면 태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실재의 세계는 그냥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만 있지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나무 잎은 계속 떨어지고 생기고 떨어지고 생겨도 계속 눈에 보이니까 푸르다고 말하고, 낙엽수는 한꺼번에 잎이 다 떨어져서 잎이 안 보이니까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봄에 보면 살아 있잖아요.

삶과 죽음도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132~137page
제목 : 몸에 병이 있어 걱정이 많습니다.

질문 :
저는 40대 중반입니다. 그동안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많이 가지고 살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갑상선에 혹이 만져져서 정밀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걱정, 불안, 초조감을 내려놓기가 힘듭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요. 불안함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질병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지요?

대답: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불안한 마음은 8~90% 이상 자기 생각에서 옵니다. 그 나머지는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겨 올 수도 있고, 또 신진대사에 이상이 생겨 그것이 정신에 영향을 주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 내용을 보면, 질문하신 분은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근심 걱정이 많다는 것은 미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괴로움이 많다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고, 근심 걱정이 많고 불안 초조해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집착이 많다는 거예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고 있는 동안은 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처럼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자꾸 되살려서 생각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이 마치 지금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감정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고 괴로워집니다. 또 내일 혹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자꾸 생각하면 머릿속에서는 그게 마치 지금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죽으면 내일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요. 내일도 생각하고 모레도 생각하고 일년 후도 생각하고 십년 후도 생각해야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좋은데 그 생각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머릿속에서는 지금 그런 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작용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 걱정이 많은 거예요. 이것은 마음에서 오는 병입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면 되는 것이고 정밀검사를 했다니까 결과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결과가 나오면 그냥 나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양성종양이라고 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겠죠. 암이면 어떡하나, 죽지 않을까, 수술하다 잘못되지 않을까, 이렇게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면 마치 그것이 지금 일어나는 것 같은 신체적 반응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게 되는 것이지요.

양성종양이다 하면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살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만약에 악성종양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약 내가 몇 년 못 산다고 하면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내 집이고 재산이고 자식이고 다 내려 놓아야겠지요. 그러니까 이것을 내가 집착을 내려놓는 좋은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악성종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악성종양이 어제 오늘 생겼을까요, 아니면 1, 2년 전에 생겼을까요? 몇 년 전에 생겼겠지요. 그렇다면 병원에 가서 밝혀진 사실은 없는 암이 오늘 생긴게 아니라 암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된 것뿐이잖아요. 없던 병이 처음 생겼다면 괴로워할 일이지만, 있었던 암을 모르고 있다가 알게되었는데 괴로워할 일은 아니잖아요? 종양이 있었지만 그걸 알기 전에는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것을 알고 난 후에 왜 괴로워 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수술도 할 수 있고 치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일 년 후에 알았으면 치료하기 더 어려워지겠지요.

지금이라도 안 것에 감사하고 얼른 대처를 하면 되는거예요.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해서 제거하면 됩니다. 수술은 의사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의사에게 맡기면 되요. 또 수술하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겠지요.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일이에요. 내가 걱정한다고 수술이 잘 되고, 걱정 안 한다고 수술이 안 되고 이런 건 아닙니다.

길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잘 될 거라고 믿고 '부처님 잘 되게 해주십시오. 아무 이상 없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몸에 대한 집착을 놓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더니 어느 날 하루아침에 '육신이란 허물어지는 것이구나!' 이런 걸 알게 되면 육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불안한 마음은 미래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니다. 이런 데서 벗어나려면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해서 현재로 가져오지 말고 지금 바로 일어나는 문제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큰 병이 아니라면 다행이고, 병이라면 거기에 맞게 치료하면 됩니다. 또 얼마 못 산다고 하면 이미 각오한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오래 사느냐 못 사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사실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만, 하루밖에 못 사는 하루살이가 오후 4시에 죽으나 8시에 죽으나 우리가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어요. 어차피 하루살이니까요. 그런데 하루살이 입장에서는 그게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처럼 육십 살까지 사느냐, 팔십 살까지 사느냐, 백 살까지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지만 좀 더 인생을 길게 보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차돈은 스물두 살에 죽어도 위대한 성자가 되었고, 예수는 서른세 살에 죽어도 성자가 됐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집착을 좀 내려 놓아야 합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한테 이런 얘기해서 안 됐습니다만 몇몇 사람 빼고는 옛날로 치면 이미 평균수명 이상 살 만큼 살았어요.


164~168page
제목 : 어떻게 해야 놓을 수 있습니까?
질문 :
놓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놓을 수 있는지요? 놓아 버리는 것은 외면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변 :
우리는 자식에게, 남편에게, 또는 좋아하는 어떤 일에 집착을 합니다. 어떤 것을 유지하고 싶고, 갖고 싶고, 제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은 꼭 하려고 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괴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낚시를 하러 가면 작은 물고기보다 큰 물고기가 걸리는 것이 좋겠지요. 만약 낚싯대에 큰 물고기가 걸렸는데 힘이 부족해서 도저히 끌어올릴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끝까지 잡고 있다가 물고기한테 끌려가서 바다에 빠져 죽는다면 어떨까요?

빠져 죽을 정도면 낚싯대에 놓아야 하는데도 안 놓고 끝까지 붙들고 있다 물에 빠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항변합니다.

"내 낚시 생활 30년에 이렇게 큰 물고기는 처음인데 이것을 어떻게 놓아. 죽었으면 죽었지 나는 못 놓겠다."

이해는 되지요. 그처럼 못 놓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뭐든지 다 놓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위험하다면 놓으란 얘깁니다. 바다에 빠져 죽을 정도의 위험에 처했다면 놓아라, 즉 괴로우면 놓아라 이 말이에요. 즐거워지겠다고 한 일인데 괴롭다면 거꾸로 된 거예요. 먹고 살자고 낚시를 하는데, 끌려 들어가서 죽게 되었을 때는 낚싯대를 놓아야 되지요.

그런데 끌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놓으라고 하면 죽어도 못 놓겠다고 이런 기회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외면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 되면 집어치우는 것을 말합니다. 고기가 안 잡히니까 낚싯대를 집어던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낚싯대를 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치워 버렸다가 며칠 후에 다시 낚싯대를 잡습니다. 이처럼 집착과 외면은 같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려는데 따른 그때그때 다르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근원은 동일한 감정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늘 집착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이 되풀이될 겁니다. 외면은 놓는 게 아닙니다. 자식에 대해서 잔소리하는 것은 집착이고 성질대로 안 되니까 에라, 공부를 하든 말든 너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은 외면입니다. 이처럼 늘 집착과 외면을 반복하기 때문에 문제가 끝이 안 납니다.

놓아 버리는 것과 외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아주 빨간 공이 있다고 합시다. 무지하게 예쁩니다. 그래서 냉큼 집었더니 뜨거운 불덩어리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앗, 뜨거!" 하고 놓아 버립니다. 뜨거운 줄 알면 저절로 놓게 되고, 죽을 줄 알면 저절로 놓아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불덩어리를 들고 뜨겁다고 고함만 칩니다. 하도 고함을 치니까 옆에서 보던 사람이 이렇게 말해요.
"놓아 버려라."
그러니까 불덩이를 쥔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요.
"어떻게 놓습니까?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럴 때 정말 방법을 몰라서 못 놓습니까, 아니면 놓기 싫어서 못 놓습니까? 놓기 싫어서 못 놓는 거예요. 아침 일찍 못 일어나는 것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방법을 묻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냥 놓아라(放下着)."
그러면 이러지요.
"그냥 어떻게 놓아요?"

그러면서 불교가 너무 어렵다고 하지요. 놓는 방법은 안 가르쳐 주고 '그냥 놓아라, 그냥 놓아라' 한다고 말이죠. 싫은 마음을 놓아야 되는데 싫은 마음은 움켜쥐고 방법을 찾으니 해결이 안 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님이 "그러면 오른손으로 옮겨라." 합니다. 오른손으로 옮기면, 아직 오른손은 덜 뜨겁고 왼손은 뜨거움이 없어지니 아주 좋아합니다. 이런 방법이 있는데 왜 이제서야 가르쳐 주느냐고 하지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다시 오른손이 뜨거워져요. 또 뜨겁다고 아우성칩니다. 방법을 몰라서 못 놓는 것이 아니고 놓기 싫어서 안 놓는 건데, 놓기 싫은 이유는 이 빨간 공을 내가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집착 때문에 못 놓는 겁니다. 손이 타 들어가는데도 아우성을 치면서 그것을 움켜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는 것은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킵니다. 우선 당면한 뜨거움도 피하고 물건도 아직은 내 손에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이런 방법을 불교에서는 '사도' 라고 합니다. 해탈의 길로 갈 수가 없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정법이 아닌 삿된 법이라는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기 싫은 마음을 그냥 움켜쥔 채 뜨거움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놓아라' 고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하고, 왼손으로 옮겨 쥐는 것을 가르쳐 주면 참 좋은 법이라고 말하지만, 조금 있으면 또 뜨거워집니다. 이런 방법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해탈의 길은 뜨거운 줄 알면 그냥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178~185page
제목 : '무아' 라는 건 되는 대로 살기?
질문 :
불교에서는 무상, 무아라고 말하는데 자기 실현이나 성취라고 할 것이 따로 있는지요? 무상이고 무아라면 애쓸 것도 없이 그냥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답변 :
예, 말은 맞습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냥 살기가 잘 안되지요. 그런데 무아에 담긴 질문자의 생각은 이런 것 같아요. '수행하기 싫은데 지금 사는 대로 그냥 살면 안 되나? 어차피 다 무상이고 무아인데 ...'

그러나 우선 말씀드리면 '그냥' 살아선 안 되고 '수행 정진' 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까?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지금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마음을 냅니까? 뭔가 욕구가 일어나서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내는게 아니겠어요? 그 욕구의 뿌리가 바로 업식입니다. 카르마라고도 합니다.

카르마는 사람에게 공통점도 있지만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형제간에도 달라요. 취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서로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떤 사람은 괴로워합니다. 똑같은 밭인데 어떤 곳에서는 콩이 나고 어떤 곳에서는 팥이 나고, 어떤 곳에서는 곡식이 나고, 어떤 곳에서는 잡초가 납니다. 그것은 뿌린 씨앗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씨앗 개념일 때는 업식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카르마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즉, 전생으로부터 갖고 온 자아' 라고 해서 이것을 아트만(atman)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나의 뿌리이고 씨앗이고 본바탕이라, 윤회를 해도 이것은 불변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논리를 부정하셨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은 부처님이 부정하신 아트만설에 근거하고, 거기에 뿌리를 둔 윤회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사상이 아니라 브라만사상이고 우파니샤드 철학이며 힌두교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잘못된 철학에 근거하고 있기 대문에 지금 우리 불자들이 이렇게 공부하는 데 힘이 드는 겁니다. 서양에서는 업식을 별로 분석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막연히 영혼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런 업(業), 소위 카르마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본래부터 있는 나의 본질이 아니라 형성된 것으로 봅니다.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생물의 종들이 본래부터 하나하나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것은 각각의 씨앗이 별도로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만 오늘날 진화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해 온 것으로, 형성과정에서 변화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형성됐다는 것은 앞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고 유전자를 바꿔 버리면 다른 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유전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불교 사상이나 불교의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생물입니다. 생물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 거예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진실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겁니다. 늙기 싫다고 해서 안 늙는게 아니고 보톡스 주사를 맞고 아무리 주름살을 제거해도 잠시 더디게 할 수 있을 뿐이지 늙음을 막을 수는 없어요. 흐르는 물도 막으면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을 뿐 꽉 차면 넘치게 되는 것처럼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가? 이것은 '생주이멸(生主離滅)' 합니다. 한 생각 불쑥 일어났다가 계속 머무르다가 그 생각이 갑자기 흩어지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너하고 나하고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자.' 하고 약속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은 사라집니다. 이게 마음의 성질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건 실제 세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변하면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으면 변하는 것을 봤을 때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요, 이 세상에서 생성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제행이 무상한 줄을 확연히 깨쳐서 집착을 놓아버리면 생겨난다고 해서 기뻐할 일도 없고, 사라진다고 해서 괴로워할 일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도무지 생멸에 구애를 받지 않게 돼요. 바다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면 파도는 다만 출렁거릴 뿐, 생겨난다고 해도 생긴 것이 아니요, 없어진다고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생멸을 꿰뚫어보면 불생불명(不生不滅)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공부를 잘못하면 부처님의 근본 교설에서는 무상함을 가르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한다고 하니까 헷갈리는 사람도 있어요.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잖아요. 얼음 따로 보고 물 따로 보면 얼음은 없어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지만 물까지 같이 보면 다만 변화할 뿐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불생불멸이란 말이 곧 무상하다는 개념입니다.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는 각자일 수밖에 없는 불변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형성된 것이므로 사라지게 마련이라서 무상한 거예요. 지금 그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만 그 프로그램의 실체는 없어요. 현재 그런 작용이 있지만 그 작용 내면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근본 알갱이라고 할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아'입니다.

오늘날 자연 상태의 생물 종들도 그 고유한 특질은 유전자로부터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를 변형시키면 종이 바뀌어 버려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얼어도 물이고, 녹아도 물이고 증발되어도 물입니다. 물은 물의 고유한 성질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수소와 산소로 분해시키면 물의 고유한 성질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을 고유함이란 없어요. 그것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되어 형성된 화합물이라는 얘기예요.

나만의 '나'라고 할, 불변하는 고유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걸 나라고 순간순간 고집하는 거예요. 이것을 깨달으면 사실 괴로워할 일이 없어요.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 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은 다 공하다(諸法皆空) 고 말하지요.

여러분이 '나'라고 하는 그것은 일시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이 몸뚱이를 지칭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어떤 물건, 일시적인 지위, 여러분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잠시 부르는 그런 것이에요. 여러분의 취미, 취향, 가치관, 믿음, 이런 일시적인 정신현상을 가지고 지금 자기로 삼고 있는 거예요. 수십, 수백, 수천 가지를 모아서 자기로 삼고 있을 뿐, 하나하나 따져 보면 거기에는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깊이 관찰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이것이 내 자동차다 할 때 내 자동차가 있어요. 그런데 자동차의 어떤 것을 내 자동차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자동차 부속을 하루에 하나씩 갈아 끼워서 100% 다 바꿔치기해 버리면 어떤 것이 '내' 자동차예요? 그냥 내 자동차라는 관념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이 자동차에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그 순간순간의 것들을 움켜쥠으로 해서 마치 나 같고, 내 것 같고, 내가 옳은 것 같고 그런 거예요.

사람이 일으키는 그 어떤 생각도 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나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앞에 있다, 뒤에 있다 하는 것이지, 사실은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뒤에 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그곳에 있는 거예요. 그곳은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에요. 앞이니 뒤니 하는 것은 내 생각이에요. 그래서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다른 거예요. 자기 위치가 다르니까. 자기가 살아온 환경, 형성된 프로그램이 다르니까, 즉 업식이 다르니까 거기에 대한 느낌, 취향이 다른 거예요.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가 맛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를 제일 싫어해요. 어느 것이 맞아요? 이것은 맞고 틀림이 아니에요. 다만 다를 뿐이에요. 조금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져보면 다 알 수 있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잠시 놓치면 습관대로 이것은 나고, 내 것이고, 내가 옳은 거예요. 이것이 중생이에요. 그래서 그 속에서 온갖 괴로움이 생기고 시비 갈등이 생기고 번뇌가 일어납니다.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고 고집하면 늘 경계에 흔들려요. 그래서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가 종노릇하는 거예요. 남의 말에, 모양에, 색깔에, 온갖 것에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무상과 무아를 깨치면 번뇌가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집니다. 그게 자아 실현이에요. 자기 자신이 온전히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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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십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질문 :
저는 대학생입니다. 젊은이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
여러분 나이에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불행이 닥쳐올 때 그것은 누가 벌을 준 것도 아니고 전생의 문제로 아니고 다만 내가 잘못 선택해서 생긴 것이라는 이치를 알면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 반감됩니다.
... 중략 ...
내가 상대방을 도와주었는데 상대방이 나를 안 도와줄 때의 실망감과, 내가 상대방을 도와주지 않았을 때 상대방이 안 도와주는 실망감은 다릅니다. 내가 도와주고도 도움을 못 받았을 때 실망감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러니까 내가 베푼만큼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자기가 베푼 만큼 대부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괴로움은 적은 반면, 어쩌다 일어나는 베풀고 못 받게 되는 1%에 대한 괴로움의 깊이는 베풀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사랑은 미움의 씨앗이라고 하잖아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미워할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철천지원수가 생깁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일은 별로 없잖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철천지원수가 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이건 모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미워하려면 모르는 사람을 미워하든지 산에 있는 나무를 미워하지, 왜 자기를 낳아 키워 준 부모를, 아니면 나하고 친했던 친구,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을 미워합니까? 이게 얼마나 모순입니까? 이게 바로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사랑하는데 행복이 있는게 아니라 사랑받는 데 행복이 있는 겁니다. 사랑을 주면 준 만큼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면 받을 확률은 높지만 혹시 받게 되었을 때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받지도 못할 사랑을 내가 무엇 때문에 줬나.' 이런 배신감이 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던 마음이 미움이 되고 실망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베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베푸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사랑을 얻는 게 목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투자예요. 사랑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전부 복권 사듯이 투자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얻는 것을 행복으로 삼는데 사실은 얻으려는 것을 놓아 버릴 때 행복해집니다. 얻으려고 하는 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얻으려는 마음을 놓아 버리면 괴로움이 생길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알아도 현실에서는 적용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태어나서부터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얻으면 행복한 것으로 뇌의 프로그램에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문제입니다.

바닷가에 가 보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지요. 그럼 바다가 기분 좋은 걸까요, 내가 기분이 좋은 걸까요? 내가 기분이 좋은 거지요.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은 바다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내가 좋잖아요. 산은 그냥 산이고, 바다는 바다이고, 하늘은 하늘일 뿐입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냥 바라는 것 없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짝사랑 해 보세요.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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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해져요.
질문 :
제가 원하는 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꾸 남이 성취한 것과 비교하면서 불행해집니다. 불행한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지요?
답변 :
질문하신 분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과 같이 크게 되려고 하는 것만이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은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겁니다. 즉 실현 불가능한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공부는 하기 싫은데 좋은 대학은 가고 싶은 겁니다. 또 '결혼을 할까? 출가해서 스님이 될까?' 이렇게 갈등하는 것도 욕심에 속합니다.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싶기도 하고, 존경받는 고승을 보면 스님이 되고 싶기도 해서 갈등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좋은 점을 다 움켜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가지려는 욕심은 인과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지은 것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자기는 상대방을 실컷 비난하면서 상대방은 자기를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인과 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성취가 안 됐다는 것은 아직 그만큼 안 쌓였다는 것이니까 더 노력하면 됩니다.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저 산꼭대기까지 가기로 목표를 정했는데 중간까지밖에 못 왔다면 계속 올라가야지 거기서 괴로워하면 어떻게 합니까? 괴로워한다고 저절로 올라가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상까지 올라간 사람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어쨌든 올라간 것입니다. 자기는 힘들고 괴롭다고 정상까지 안 가면서 남이 정상까지 올라간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워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건강이 나쁘면 나쁜 만큼, 걸음걸이가 느리면 느린 만큼 천천히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한 시간 만에 갔으면 나는 두 시간만에 가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오전에 갔다 오면 나는 저녁까지 갔다 오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하루 만에 갔다 오면 나는 이틀 만에 갔다 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10만원 벌면 나는 5만원 벌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짬뽕 먹을 때 나는 자장면 먹으면 되는 거예요. 괴로워하면 자기 인생만 낭비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왜 일어나느냐 하는 걸 자세하게 알면 괴로울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치를 알긴 아는데 그래도 괴로운 것은 그 순간 욕심이 사로잡혀서 안 보이기 때문이에요. 조금만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세요. 같이 등산을 갔는데 다른 사람은 이미 정상까지 갔고, 나는 중간쯤 왔다면 그게 왜 괴로운 일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기뻐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내려갈건데 무엇 때문에 정상까지 다리 아프게 올라갑니까? 다시 내려갈 걸 생각하면 내가 더 낫습니다. 나는 금방 내려갈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앞으로 한참 내려와야 하잖아요.

우리가 출가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은 왕위를 버렸습니다. 어차피 버릴 거라면 부처님보다 우리가 유리하잖아요. 나한테 왕위가 있다면 그것을 버리기가 얼마나 아깝겠어요. 그런데 왕위는 우리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까울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결혼했다 이혼할 거라면 안 한 게 얼마나 좋아요. 일이 훨씬 적잖아요.

담배 피우는 것을 배우는데 나는 기침하고 물 마셔 가면서 열흘 만에 배웠는데 다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쉽게 배웠다고 합시다. 계속 담배를 피우는 쪽으로 갈 때는 담배를 잘 피우는 사람에게 열등의식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끊는 쪽으로 가면 내가 더 유리합니다. 더 나아가 어차피 끊을 담배라면 처음부터 안 피운 사람이 훨씬 유리하지요.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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