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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Review

암흑 속에서 자유를 캐낸 위인

Actruce 2017. 12. 3. 22:59

 

헬렌 켈러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그녀가 삶을 마감할 때 조용히 돌아보며, 적은 것이 아니라 대학생의 치열함을 가지고 있을 때 쓴 글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고통, 고뇌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그녀는 어떻게 일반인 처럼 책을 읽고 말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유명인사가 되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보이지 않아도 듣을 수 있거나 들을 수 없어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헬렌 켈러는 1살의 나이에 이 모든 장애가 찾아온 지극히 불운한 아이이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그녀가 장애를 극복해 낸 것만으로 위인전에 나오게 된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녀 보다도 그녀를 도와준 조력자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부모의 물심양면의 지원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라는 이름은 남겨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앤 설리반 외에 전혀 몰랐던 뜻밖의 인물이 나옵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그가 그녀에게 꼭 필요했던 설리반 선생님을 소개시켜준 사람이며 상급학교 진학시에도 역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앤 설리반 선생님을 헬렌 캘러는 천사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그녀가 능력이 뛰어나거나 혹은 특별한 농아들을 위한 교수법을 잘 살렸기 때문에 존경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정말 뛰어난 참을 성을 가졌습니다. 수 없이 헬렌 켈러가 넘어지고 투정 부릴 때 옆에서 늘 포기하기 않고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헬렌 켈러가 단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현상을 눈으로 감지할 수 없었고 오로지 촉감으로만 인식해야 했고, 또 그것을 말로 따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느낌을 반복적으로 손에 적어야 어느 순간 그 낱말을 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물' 이란 단어를 익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펌프가를 뒤덮은 겨우살이 향기에 이끌려 오솔길을 걸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 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위로 세차게 내리꽂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가져다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45p, 4 <사물의 비밀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내게 사랑을 주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

 

고유 명사들에 대해 익혀갈 무렵 그녀는 관념을 나타내는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 익히는 것은 무척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다' 라는 의미를 익히는 과정을 볼까요?

 

그로부터 하루 이틀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무리지어 놓은 각기 다른 구슬들을 큰 거 두개, 그보다 작은 걸로 세 개 하는 순서로 꿰고 있었다. 나는 자꾸 틀렸고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친절하게 잘못을 바로잡아주셨다. 그러다 어는 순간 내가 어디서 자꾸 틀리는지 알게 됐고 작업에 정신을 집중하게 됐으며 어떻게 해야 틀리지 않겠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 이마에 대고 '생각하다'라고 결정적인 한 단어를 쓰셨다.
 
바로 그때 나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되던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바로 그 단어를 섬광과도 같이 깨우쳤다. 추상적인 개념을 최초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릎 위에 놓은 구슬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래도록 가만히 앉아서 나는 사랑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루 종일 흐린 날씨였다. 그런데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남부 특유의 찬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물었다. "선생님, 사랑은 이런 건가요?"
"그래 맞아, 사랑은 햇살이 비추기 전 끼어 있던 구름 같은 거란다."
당시의 나로서는 이 짧은 한 문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헬렌,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구름을 만질 수는 없단다. 그러나 비를 만질 수는 있지. 한낮의 무더위에 시달려 목마른 대지와 꽃들이 이 단비를 받아 마시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잘 알잖니? 사랑도 꼭 그렇단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모든 것 위에 부어지는 그 달콤함만은 느낄 수 있지. 사랑이 없다면 행복하지도 뭘 하고 싶지도 않을 거야."
이 아름다운 진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과 사람의 영혼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끝이 느껴졌다.

55~56p, 6 <이 아름다운 진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밖에도 헬렌 켈러는 무수한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특히 캠브리지 여학교에서는 래드클리프 여자대학(하버드 자매 대학) 에 진학하기 위한 준비 학교 개념이었는데 그녀는 언어에 소질이 뛰어난 편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등을 익히며 독서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해에 나는 수학 과목을 마쳤고 라틴어 문법을 복습했으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3장까지 읽었다. 그 밖에도 일부는 내 손가락으로 일부는 설리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실러의 <종을 위한 노래>와 <잠수부>, 하이네의 <하르츠 기행>, 프라이타크의 <프리드히리 대왕의 나라>, 릴의 <아름다운 저주>, 레싱의 <민나 폰 바른헬름> 그리고 괴테의 <나의 생애로부터> 를 독일어 원어로 읽었다. 이 책들을 읽을 때가 가장 좋았다. 실러의 서사시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위업이 기록된 역사 그리고 괴테의 삶을 그린 글들은 특히 더했으며 <하르츠 기행>은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의 글엔 포도넝쿨로 뒤덮인 언덕이며 햇살을 받아 잔물결을 일으키며 졸졸 흐르는 시내,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과 전설로 신성시되는 땅 그리고 오래 전 오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프란체스코회 수녀들에 이르기까지 상상의 시대, 오직 자연을 느끼고 사랑하고 탐구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능력, 사람을 마냥 행복하게 하는 익살과 매력이 흘러 넘친다.

140p.  18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소녀들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귀머거리이자 맹인인 헬렌 켈러는 수학을 특히 어려워 했는데, 눈, 귀 멀쩡한 사람들도 헤매는 마당에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갔을지 생각하면 참 아득합니다. 그녀가 한 말을 보면,

 

대수와 기하학 시간에는 필기를 해야 했고 물리 또한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풀이 과정을 한 단계씩 적어 내려가는 브라유 라이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했다. 칠판 위에 그려진 도형을 볼 수 없으니 그 형태가 어떠한지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직선과 곡선 모양의 철사를 가지고 구부려 모서리를 뾰족하게 해서 받침대 위에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키스 선생님이 보고서에 쓴 것처럼 나는 도형의 부호, 가설과 결론, 작도와 증명 과정 등을 일일이 머릿속에 옮겨놓아야만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느 학과나 그에 따른 애로사항이 있다고 봐야 했다. 가끔 나는 그만 용기를 완전히 잃고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다시 떠올리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펴고 거친 곳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것에서 지내는 동안 내게 가장 친절했던 유일한 친구인 설리번 선생님에게까지 그런 내 감정을 있는 대로 마구 터뜨려댔다.

149p, 19 <대학에 들어가기까지의 온갖 난관과 장애물>

언뜻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려 봐도 이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앤 설리번 선생님이 일대일로 전담 통역 (통역이라는게 수화 알파벳으로 일일히 헬렌 켈러의 손 바닥에다 글자를 만들어 본인이 들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 하는 식인데, 말을 손으로 전달해야 하니 느릴 수 밖에 없고, 헬렌 켈러는 이런 과정에서 다른 동급생에 비해 아무래도 진도를 쫓아가는 것 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편하게 귀로 듣고 교수의 표정과 제스처까지 확인하여 내용을 새겨 듣는 동안, 그녀는 오로지 설리번 선생님의 수화 알파벳을 쫓가가기 바빴고, 필기는 언감생심. 수업 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게 맞는지 다시 얘기해 보고, 자신의 생각을 타이프로 반복해서 쳐 봤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의 삶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가 바로 래드클리프 대학 진학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의 이론적인 교육과 방대한 학습량은 그녀를 질리게도 만들었습니다. 비단 그녀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대학생이라면 한번쯤, 이 상아탑에 갖힌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순간을 갖을 때가 있는데요. 그녀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거 같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옛 그리스 아테네의 보편성이 살아 숨쉬는 학문의 전당은 아니었다. 위대한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곳도, 현자와 얼굴을 맞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도, 다시 말해 살아 있는 만남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미라가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줄기줄기 금이 간 학문의 벽으로부터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해부하고 분석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잘 만들어진 모조품이 아닌 진짜배기 밀턴과 이사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많은 학자들이 위대한 문학작품이란 이성으로서보다는 감성, 깊이 있는 감성의 무게로 읽히고 향유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공들여 써놓은 해설 중 어느 것 하나 변변히 기억되는 게 없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정신은, 과실이 무르익으면 나무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잘 익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법이다. 꽃을 알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 뿌리와 줄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예를 들어 성장의 전 과정을 연구하라. 그러고 나면 비로소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하늘이 내린 이슬로 방금 씻고 나온 청초한 한 송이 꽃, 그를 아노라 할 수 있을까? 하여 나는 지칠 줄 모르고 묻고 또 묻는다. "어찌하여 나는 이러한 가설과 설명들로 스스로를 들볶는가?" 마치 눈먼 새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날개를 파닥이며 공기 중을 떠돌듯이 내 생각들 또한 그렇게 내 정신 속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나는 지금 우리가 읽는 문학작품이 결코 지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해설과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비평들만이 정답인 양 받아들여지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의견들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키트리지 교수처럼 훌륭한 학자가 대문호의 말을 해석해줄 때 우리는 "눈먼 자에게 내려진 새로운 빛을 본다." 그는 바로 살아 숨쉬는 시인 셰익스피어를 우리 눈앞에 불러오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토록 배우고 싶어 했던 것들에서 뚝 잘라 반을 싹 쓸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리 그것이 값지고 좋은 것이라 한들 과부하에 걸린 정신으로야 어찌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하루 만에 각기 다른 언어로 쓴 네댓 가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주제를 폭넓게 다루면서도 책을 읽는 본래의 목적을 놓치지 않는다는 게 나로서는 불가능한 노릇만 같았다. 시험 준비에 쫓겨 급하게 또 초조해하면서 책을 읽으면 머릿속이 온통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낡은 고물로 가득 차서 뭘 어떻게 찾아 써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지금 내 머릿속이 바로 그렇다. 도저히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별개의 문제들로 꽉 들어차 있다. 그리하여 내 정신의 왕국,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마치 중국인 가게에 들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왕왕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온갖 지식의 잡동사니들이 우박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이를 피해 도망가려 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온갖 종류의 대학 도깨비들이 내 뒤를 쫓는다. 아, 남모르게 품어온 사악한 소원이 있었단가. 나 이제 그 소원을 내려놓고 용서받고 싶다. 이제껏 숭배해온 그 우상을 내려치고 싶어진다.
 
뭐니 뭐니 해도 대학생활의 일등 도깨비라면 그건 바로 시험이다. 얼마나 자주 그것들과 맞서 싸워 기어이 거꾸러뜨려 흙 속에 처박아버렸던가. 그러나 놈들은 부스스 일어나 창백한 얼굴을 들이내며 협박을 해댄다. 마침내 밥 에이커스처럼 용기란 용기는 모조리 손가락 끝으로 빠져 나갈 때까지. 이와 같은 시련이 닥치기 전 며칠은 머릿속에다 아리송한 공식들과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많은 온갖 연대들을 있는 대로 쑤셔 담느라 분주하다. 입에도 맞지 않는 식사에 질려 나중에는 차라리 책이고 과학이고, 그뿐인가 나 자신마저도 깊은 바다에 처넣고 싶어진다.
 
165-168p, 20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활짝 열린 신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이 책은 헬렌 켈러가 대학생 때 칼럼에 기고한 내용들입니다. 이 후의 그녀의 업적인 전기를 통해 확인하면 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절망적이고 불공평한 결핍을 극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저는 그 것이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고 봅니다. 처음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하고 그걸 가족들이 알게 되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그녀는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뻐할 모습에 설레어 끊임없이 완벽하게 소리 내기 위해 연습, 또 연습 했다고 합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를 지도하는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독특한 어려움이라고밖엔 표현할 길 없는 곤란한 문제들이 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선생님의 목이 어떻게 떨리는지, 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얼굴 표정이 어떤지를 읽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은 단지 촉각밖에 없는 데다 그 방법에는 늘 실수가 잦다. 그때마다 나는 단어가 됐든 문장이 됐든 다시 말하기를 반복하며 때론 몇 시간이고 내 목소리가 정확하게 울려 나올 때까지 계속 되풀이한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나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실망하고 금세 지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제 곧 집에 돌아가면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룬 놀라운 성과를 보여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다시금 연습에 박차를 가하게 해주었다. 나는 정말이지 내 성취를 보고 기뻐할 가족들 모습을 쉬지 않고 그렸다.
"동생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이 생각 하나만으로도 모든 장애를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벙어리가 아니다." 수없이 이 말을 되뇌었다. 엄마에게 말을 건넨 다음 엄마의 입술을 더듬어 대답을 읽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고대하는 동안 낙담이 들어설 여지라곤 없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철자를 적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알고 깜짝 놀랐다.
 
100p, 13 <누군가 나를 대신해 말해주지 않아도 내 입을 통해 나간 말이 다른 이에게 전해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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